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이성계의 <사불가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성계50.png|width=100%]]}}} || || {{{#000000 '''[[태조(조선)|이성계]](李成桂)''' }}} || 사냥을 핑계로 이동하며 요동 공격 준비에 착수하던 우왕은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인 봉주(鳳州)에 도착했을 무렵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우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최영하고만 단 둘이서 논의하곤 했었으나, 이번 요동 정벌은 예외적으로 처음, 이성계에게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워낙에 중대한 사안인만큼 이성계가 고려 말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견미 등을 소탕하는데 최영과 더불어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우왕이 이성계에게도 동의를 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양을 치는데 힘을 써주라는 우왕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여기서 우왕에게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逆擊)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以小逆大其不可(이소역대기불가).]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夏月發兵其不可(하월발병기불가).]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擧國遠征倭乘其虛(거국원정왜승기허).]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時方暑雨弩弓解膠大軍疾疫(시방서우노궁해교대군질역).]"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우왕 14년 4월 1일(음) [[http://db.history.go.kr/id/kr_137r_0010_0040_0010|#]]}}} 그러나 우왕의 요동 정벌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보이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기정 사실로 여기는 대신 전략상의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즉 정 공격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시기는 좋지 않으니 좀 더 적절한 때를 노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전하께서 꼭 이 계책을 성취하려고 하신다면, 일단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군사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이니 사기가 높은 가운데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은 수확기. 즉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가을로, 이 때 미곡이 풍부해지며 비례하여 군량이 가장 풍족해진다. 날도 선선해지므로 더위에 탈진할 일은 줄어들게 되며, 따라서 최대 효율로 행군하여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이성계는 정 공격하겠다면 하며 자기 입장에서의 차선책을 내놓은 것이었으나...] 지금은 군사 행동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오니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참화를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우왕 14년 4월 미상(음) [[http://db.history.go.kr/id/kr_137r_0010_0040_0020|#]]}}} 즉 여름철에 무리하게 행군할 것이 아닌 좀 더 기다려서 가을철에 행군하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우왕은 이성계를 채근하면서 >'''"경은 이자송의 꼴을 못 보았는가?"'''(卿不見李子松耶?) 고 협박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렇게 반박했다. >"이자송이 죽긴 했으나 후대에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살아 있긴 해도 이미 전략상 큰 실책을 범했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우왕 14년 4월 미상(음) [[http://db.history.go.kr/id/kr_137r_0010_0040_0020|#]]}}} 계속해서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우왕은 전혀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이성계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물러나면서 >'''"이제 참화가 시작되었다."''' 고 했다.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이성계의 발언이 [[해적: 바다로 간 산적|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사대주의]] 발언으로 오인받아 비판받기도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전쟁을 벌이기엔 신생 강대국 명나라의 국력에 비해 부정부패와 잦은 전란으로 고려의 국력이 약하니 이길 가능성이 적은 상황에서의 선제 공격은 무모하다는 상식적인 말일 뿐이었다. 또한 사대주의적인 관점에서 놓고 본다 해도 '''이 발언은 [[척준경]] 등이 인종(제17대)에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라며 건의하고, 인종이 이를 받아들여 자신을 신하(臣)로 칭하며, 금나라와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었을 때 있었던 말로 이성계가 처음 한 말은 아니었다.''' 특히 '선왕의 법도'라는 부분을 보면 전부터 이런 사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척준경이 대여진 전쟁에서 용맹을 자랑했던 무장 출신이었음을 봤을 때, 피비린내나는 전장에서 전쟁에 대한 환멸을 느껴 그랬을 수도 있다. 또한 이 발언은 전략, 전술적 입장에서 크게 틀리다고 볼 법한 부분은 없다. 단어 그대로, 큰 땅덩어리에 병력도 훨씬 더 많은 국가를 작고 병력도 적은 나라가 먼저 나서서 경솔히 침공해 그 영토 깊숙히 들어가게 된다면, 당연히 포위섬멸을 당할 위험성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며, 이렇게 잘못해서 원정군이 전멸했을 경우 비어있는 본국은 [[빈집털이]]를 당할일밖에 안남는다. 이는 당장 [[고구려]], [[발해]], [[고려]]도 몇번 당해봤던 위기상황이다. 당시 명나라는 신생국인데다가 고려가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되찾은 철령 이북 땅을 멋대로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고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이성계가 명을 '큰 나라' 라고 말한 것은 사대의 의미가 아니라 국력이 우리보다 더 크다는 것[* 당시 명나라는 신생국인데다가, 주원장과 함께 홍건적 시절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수들이 잔뜩 있었기에 군사들의 기강도 어마무시했다. 홍무 연간 명나라는 10만~20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수도 남경에서 수천km나 떨어진 몽골 초원 지대에 수차례 투사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을 의미할 뿐, 사대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가 명백하게 명나라에게 사대를 할 의사가 있었으면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바로 명나라에게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홍무제와 툭하면 외교적 신경전을 벌였고[* 대표적으로 건국 초기 조선의 실세였던 정도전이 노골적으로 반 명나라 스탠스를 취하자 홍무제는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당장 압송해오라고 지시하였지만 이성계는 이에 굴복하거나 조아리기는 커녕 배 째라며 뻗댔다. 결국 빡친 정도전이 제3차 요동 정벌 이야기까지 꺼내는 지경에 이르렀고, 홍무제 또한 저러다 쟤네 진짜 쳐들어오는거 아니냐며 잔뜩 날을 세울 정도로 조선과 명나라는 살벌한 상황까지 치달았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와의 관계는 조선 태종 이방원 치세때 명나라에서 성조 [[영락제]] 주체가 즉위하고 나서야 사대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불가론> 이후에 이성계는 우왕의 요구에 동의했으며, 대신 공격의 시점을 가을로 물리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은 이성계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내놓은 타협책이었으며, 당시 말한 전략상의 이유도 큰 허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성계는 '''실제로 요동을 공격해서 잠시나마 점령했던''' [[제1차 요동정벌]]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시 고려에서 가장 경험 있는 인물의 주장이었다. >'''요동성을 점령한다고 해도, 군량이 떨어지고 더 진격하지 못하면 별 소득도 없다.''' 는 언급은 제1차 요동 정벌 당시의 전황을 그대로 말한 사례로써,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묵살됨에 따라 이성계는 자신이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략상의 이유가 아닌 이성계라는 인물의 세력으로 보아도, 요동 정벌이 현실화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이 이성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조상 대에 원나라에서 천호장으로 일하다가 고려에 귀부한 이성계는 그래서인지 [[왜구]]와 [[홍건적]], [[나하추]]와의 싸움에서 눈부신 무공을 세우면서 싸웠고, 그렇게 이성계의 전주 이씨 가문은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 공훈을 올렸다. 친명 정책을 표방하는 유생들이 이성계와 접촉했던 이유도 입장상 철저한 반원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성계의 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고려 우왕 대 이성계와 정몽주 • 정도전의 정치적 결합>, 김당택] 그런 이성계에게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라고 하는 것은 입장상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비록 임견미 등을 척살하며 부각되긴 했더라도 본래 정계에 기반이 약했던 이성계로서는 [[가별초]](家別抄)로 유명한 자신의 최강 사병 세력과, 동북면에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이형우]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사병들이 소진되고, 혹시 명나라의 역습이 현실화된다면 가장 먼저 짓밟힐 곳도 이성계의 군사적 & 경제적 기반으로 당시 사실상 '이성계의 [[영지(역사)|영지]]'나 다름없었던 동북면이었으니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반대 주장이 순전히 이성계의 개인적인 이익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요구한 철령위는 바로 이성계의 근거지인 동북면이었다. 이성계 역시 자신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우왕의 요구에 동의하며 그 대신 내놓은 타협책마저도 '얻어 맞아 죽은 이자송' 의 이름까지 나오며 무시되자 이성계로서는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이성계의 의지도 무시되었을 만큼 당시 우왕과 최영은 제2차 요동 공격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며 일전에 처리한 임견미, 염흥방의 가산을 털어서 쓰고, 전국의 승려들마저 징발하여 승군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이제 요동 공격은 피할 수 없는 일로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